300만 서명과 의원들의 반대에 굴복한 영국의 디지털 신분증 계획

300만 서명과 의원들의 반대에 굴복한 영국의 디지털 신분증 계획

영국 정부가 필수 디지털 신분증 계획을 철회했다. 2029년 도입 예정이던 ‘브릿카드’는 선택사항으로 전환되며, 근로자들은 기존처럼 다른 서류로도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 정부 소식통은 “필수 조항이 디지털 ID 활용에 대한 논의 자체를 가로막고 있었다”며 “65세 시골 노인이 앱 설치를 못해 일자리를 잃는 상황을 감수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번 정책 철회는 의회의 강력한 반대가 결정적이었다. 지난달 의회 토론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비판이 쏟아졌다. 제레미 코빈은 “국민이 감시에 대해 합리적인 우려를 느끼고 있다”고 했고, 보수당 로비 무어는 “전 세계 해커들에게 꿀단지를 제공하는 격”이라고 맹비난했다. 토론장에서는 “국민은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외치던 시위자가 끌려나가는 소동도 벌어졌다. 정책 중단을 요구하는 청원에는 300만 명 이상이 서명했다. 시민단체 빅브라더워치는 지난 12월 스타머 총리 가면을 쓰고 의회 광장을 행진하며 저항 의지를 드러냈다.

 

보수당과 개혁당은 계획 철회에 일제히 환영 입장을 냈지만 정부의 잦은 정책 번복을 비판했다. 보수당 마이크 우드는 “13번째 유턴”이라며 “스타머의 우유부단함이 패턴화되고 있다”고 했고, 개혁당 나이절 패라지는 디지털 ID 자체를 완전히 폐기하겠다고 밝혔다.

 

디지털 ID는 휴대전화에 개인정보를 저장해 온 오프라인에서 신원을 확인하는 시스템이다. 애플이나 구글 월렛에 결제카드가 저장되는 방식과 비슷하며, 이름, 생년월일, 국적, 사진 등이 담긴다. 영국은 고용 사기 방지, 복지 신청 간소화, 임대 절차 개선 등을 내세웠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 여러 나라가 비슷한 시기에 디지털 ID를 도입하고 있지만, 내세우는 명분은 제각각이라는 사실이다. 인도는 2009년 아다르를 도입하며 부패와 복지 누수 방지를 강조했다. 13억 명 이상에게 발급됐지만 보안 사고가 잇따랐고, 2023년에는 8억 명 이상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에스토니아는 2002년 디지털 정부 효율성을 내걸고 전 국민의 99%에게 e-ID를 발급했다. 싱가포르는 정부 서비스 접근성 향상을, 일본은 행정 절차 간소화를 명분으로 삼았다.

 

한국은 2021년 모바일 공무원증으로 시작해 2022년 운전면허증, 2023년 국가보훈등록증, 2024년 주민등록증, 2025년 외국인등록증으로 범위를 넓혔다. 행정안전부는 “국민불편 해소와 디지털 비대면 경제의 신뢰 확보”를 내세웠다. 하지만 영국과 달리 의회 토론이나 대중적 논의는 없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했고, 언론이나 시민사회의 문제 제기도 거의 없이 진행됐다. 163억 원 규모의 모바일 주민등록증 사업이나 77억 원의 통합인증 서비스가 국민적 합의 없이 조용히 추진되었다.

 

영국의 독립 언론인 이언 데이비스는 영국 정부의 이번 철회가 단순한 후퇴가 아니라 더 교묘한 전략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전 세계 디지털 ID 시스템은 사실 단일 카드나 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있는 운전면허증, 여권, 은행 카드 같은 여러 디지털 ID 제품들이 ‘상호 운용’ 방식으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이룬다.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 16.9가 바로 이런 데이터 상호운용성을 목표로 한다.

 

영국 정부는 이미 ‘원로그인’이라는 디지털 ID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기존 신분증을 활용해 정부 서비스에 접속하는 방식이다. 즉, 브릿카드 같은 새로운 카드가 없어도 이미 디지털 ID 인프라는 작동 중이다. 데이비스는 “시스템과 상호작용하면서 여러 디지털 ID 제품을 통해 당신의 디지털 신원이 자동으로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디지털 ID 연결 제품 상호운용성의 핵심이다.

 

주목할 점은 이 시스템을 운영하는 기업들이다. 원로그인의 보안은 미국 기업 액센츄어가 맡았다. 액센츄어는 세계경제포럼 이사인 줄리 스위트가 이끌며, 피터 틸의 팔란티어, 래리 엘리슨의 오라클과 파트너다. 이들은 모두 정보기관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팔란티어는 영국 정부의 국방과 보건 부문에, 오라클은 디지털 전환에 깊숙이 관여한다. 엘리슨은 토니 블레어의 측근이자 토니 블레어 연구소의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엘리슨은 2024년 9월 투자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민들은 모범적으로 행동할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지속적으로 기록하고 보고하니까요.” 토니 블레어 연구소는 올해 2월 국가데이터도서관 청사진을 발표했다. 사회 전 영역의 데이터를 하나의 중앙 데이터베이스에 모으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 다른 곳에서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통일된 번호, 즉 조화된 개인 식별자”가 필요하다고 명시했다.

 

데이비스의 분석은 이렇다. 브릿카드는 애초에 국민을 설득하려는 게 아니었다. 발표 시기도 최악이고, 논리도 허술하며, 영국인이 받아들일 리 없다. 이것은 미끼다. 브릿카드 논쟁이 벌어지고, 국민이 분노하고, 결국 노동당 정부와 함께 브릿카드가 폐기된다. 그러면 보수당이든 개혁당이든 “다시는 이런 정부 발행 신분증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집권한다. 하지만 “디지털 혁명에 발맞추기 위해” 기존 면허증과 카드들은 “상호운용성을 위해” 업그레이드된다. 결국 대중은 승리했다고 기뻐하면서, 그것이 디지털 ID인 줄도 모르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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