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미성년자 VPN 금지 추진, ‘아동 보호’인가 ‘감시 인프라’인가

영국 미성년자 VPN 금지 추진, ‘아동 보호’인가 ‘감시 인프라’인가

영국 정부가 미성년자의 VPN(가상사설망) 사용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방안을 공식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키어 스타머 총리는 지난 15일 “기술은 빠르게 변하고 있으며, 법도 그 속도에 맞춰야 한다”고 선언하며 오는 3월 3개월간의 공개 협의를 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협의 대상에는 미성년자 소셜미디어 사용 금지, 무한 스크롤 제한, AI 챗봇 접근 제한과 함께 VPN 규제가 포함된다.

 

이번 발표는 지난해 7월 시행된 온라인안전법의 후속 조치다. 해당 법은 성인 콘텐츠 사이트에 신분증 확인이나 안면 인식 기반 연령 인증을 의무화했다. 그런데 당초 아동 보호를 내세웠던 이 법의 적용 범위는 시행 직후부터 빠르게 확대됐다. 데이트 앱, 엑스박스 계정, 취미 포럼, 레딧 커뮤니티까지 연령 인증 대상이 됐고, 연령 인증 비용과 절차를 감당하지 못한 소규모 독립 사이트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VPN은 이 규제를 우회하는 수단으로 급부상했고, 법 시행 이후 영국 내 VPN 사용량은 6,430%나 폭등했다. 앞서 1월 상원은 미성년자의 VPN 사용 금지 개정안을 207 대 159로 통과시켰다.

 

이번 패키지에는 영국에서 판매되는 모든 스마트폰과 태블릿에 ‘변조 방지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의무 탑재하는 방안도 들어 있다. 아동 성착취물 탐지를 명분으로 기기에 저장된 파일 전체를 스캔하는 방식이다. 애플이 2021년 동일한 방식을 제안했다가 보안 연구자들의 강한 반발로 조용히 포기한 전례가 있다. 당시 핵심 우려는 ‘범위 확장’이었다. 오늘은 성착취물을 스캔하지만, 내일은 정치적으로 불편한 콘텐츠로 대상이 넓어질 수 있다는 논리였다. 온라인안전법은 이미 그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증명했다.

 

프라이버시 감시단체 빅브라더워치의 실키 카를로 대표는 VPN 규제를 “완전히 무지하고, 위험하며, 비민주적”이라고 규탄했다. VPN을 쓰려면 먼저 신분증이나 생체정보를 제출해야 하는 구조, 즉 프라이버시 보호 도구를 이용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개인 신원을 먼저 노출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사실상 영국 전체 VPN 이용자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효과를 낳는다고 경고한다. 카를로 대표는 이 규제가 중국, 러시아, 북한과 같은 반열에 영국을 올려놓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온라인안전법이 낳은 파장은 이미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게임 커뮤니티 플랫폼 디스코드는 오는 3월부터 전 세계 이용자를 대상으로 연령 인증을 확대 시행하겠다고 밝혔는데, 영국 이용자 일부에게는 퍼소나(Persona)라는 별도 업체가 인증을 처리한다는 공지가 전달됐다. 디스코드는 이를 “실험”이라고 표현했지만, 이용자가 제출한 개인정보는 최대 7일간 퍼소나 서버에 저장된다. 문제는 퍼소나의 최대 투자자가 피터 틸이라는 점이다. 틸은 미국 이민단속국(ICE)의 디지털 추적 시스템을 구축한 감시 기업 팔란티어의 공동창업자로, 아동 보호를 명분으로 수집된 생체 및 신원 정보가 결국 누구의 손을 거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흐름은 영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호주는 지난해 12월 16세 미만의 소셜미디어 사용을 전면 금지했고, 규제 당국은 플랫폼들에 VPN을 이용한 우회 접속까지 차단하도록 주문했다. 프랑스도 15세 미만의 소셜미디어 금지를 추진하며 VPN 규제를 검토 목록에 올렸고,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여러 나라도 비슷한 방향을 저울질하고 있다. 연방 차원에서 규제에 소극적인 미국과 달리, 영미권과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이 앞다퉈 인터넷 접근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실효성 논란도 거세다. 연령 인증을 도입하지 않은 성인 콘텐츠 사이트가 여전히 수없이 많아 아이들은 VPN 없이도 해당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도 Tor 같은 분산형 네트워크나 자체 프록시를 활용하면 규제 우회가 어렵지 않다. 프로톤VPN과 멀바드 등 주요 업체들은 “수학을 규제할 수는 없다”고 맞서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VPN 규제, 기기 스캐닝 의무화, 연령 인증 확대가 한꺼번에 추진되는 지금, 각각의 조치가 합쳐져 시민 전체를 잠재적 감시 대상으로 놓는 포괄적 디지털 감시 체계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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