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티코가 지난 3월 미국 성인 3,85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최근 보도하면서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을 ‘반백신 활동가’로 규정하고, 백신에 의문을 품는 미국인이 늘고 있다는 사실을 일종의 경보처럼 전달했다. 그러나 보도가 정작 놓친 더 중요한 신호가 있다. 백신에 의문을 품는 순간 반과학으로 낙인찍히고, 그 낙인이 정치적 무기가 되는 시대가 왔다는 경고다.
케네디는 스스로를 ‘반백신주의자’라 칭한 적이 없다. 그는 일관되게 백신의 안전성 검증 강화와 제약 산업의 투명성 확보를 요구해 왔다. 보건복지부 장관 취임 전 그가 이끌던 ‘어린이 건강 보호 재단’은 특정 백신의 즉각적인 금지가 아니라, 독립적인 안전성 연구와 감독 기관이 제약 산업에 포섭되는 구조를 핵심 의제로 삼았다. 그런데도 폴리티코를 비롯한 주류 언론은 그를 “오랜 반백신 활동가”로 소개하며 그의 주장에 귀 기울이는 시민들을 같은 틀 안에 가두었다.
이 보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은 사실 따로 있다. 전체 응답자의 47%가 집단 건강보다 개인의 의료 선택권을 우선해야 한다고 밝힌 반면, 카멀라 해리스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는 압도적으로 ‘과학은 명확하며 이에 의문을 갖는 것은 위험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65세 이상 응답자의 3분의 2, 해리스 지지자의 3분의 2가 백신 접종에 ‘사회적 의무’가 있다고 답했다. 폴리티코는 이를 마치 ‘이성의 편’이 누구인지를 암시하는 방식으로 배치했다.
그러나 과학의 역사는 정반대의 교훈을 품고 있다. 철학자 칼 포퍼는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이야말로 과학을 과학으로 만드는 조건이라고 밝혔다. 어떤 이론이든 원칙적으로 반박될 수 없다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핵심 논지였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더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는 과학을 “전문가들의 무지를 믿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질문하지 않는 과학, 반증을 허용하지 않는 합의는 과학의 이름을 빌린 이념에 불과하다.
역사는 ‘과학적 합의’가 얼마나 자주 틀렸는지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19세기 오스트리아 의사 이그나츠 제멜바이스는 산부인과 의사들이 손을 씻지 않아 산모들이 사망한다는 사실을 데이터로 제시했다. 당시 의학계의 합의는 그를 거부했고, 그는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쳤다. 1950년대 탈리도마이드는 임신부에게 광범위하게 처방됐다. ‘과학적으로 승인된’ 이 약은 수천 명의 신생아에게 심각한 기형을 초래했다. 수십 년간 담배의 안전성을 옹호한 것도 ‘과학적 연구들’이었다. 그 연구들의 배후에 담배 산업의 자금이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드러났다.
더 뿌리 깊은 경고는 ‘사이언티즘(scientism)’이라는 개념 안에 있다. 사이언티즘은 과학적 방법론을 신뢰하는 태도가 아니라, 과학의 권위를 모든 인간 문제에 대한 최종 판결로 삼는 신앙 체계를 가리킨다. 철학자 C. S. 루이스는 과학이 모든 것에 답할 수 있다는 믿음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에 대한 신화라고 썼다. 하버드 의대 출신 소설가 마이클 크라이튼은 2003년 강연에서 합의는 과학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이라고 말했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수상 강연 제목을 ‘지식의 오만’으로 붙이며 과학 방법론을 무비판적으로 이식하려는 태도를 사이언티즘이라 명명했다. 그 권위에 물음표를 붙이는 순간 이단의 낙인이 찍히는 구조를 폴리티코 보도가 정확히 재현했다.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은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에서 과학의 발전이 점진적 지식 축적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전복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밝혔다. 기존 패러다임을 지키려는 세력이 항상 있었고, 이들은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비과학’이라며 묵살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제안과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통한 하늘 관측은 당대 과학계의 합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합의를 지키려는 힘이 강할수록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교리가 된다.
폴리티코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이 ‘과학은 명확하다’는 입장을 더 강하게 취한 것이 우려스러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정치적 정체성이 과학적 판단을 앞설 때, 그리고 특정 정당 지지자들이 ‘옳은 과학의 편’과 동일시될 때, 과학은 탐구의 도구가 아니라 정치적 충성심의 상징이 된다. 미국 소아과학회의 백신 스케줄이 철옹성처럼 취급되고, 그 스케줄 자체를 검토하자는 제안이 ‘위험한 발언’으로 처리되는 현실은 과학의 건전성보다는 기관의 권위를 수호하는 방어 기제에 가깝다.
특정 백신의 안전성을 묻고 접종 일정의 근거를 따지는 것은 반과학이 아니라 과학의 정상적인 작동 방식이다. 어떤 백신이, 어느 연령대에, 어떤 임상 검증을 거쳐 권장되어야 하는지는 언제든 재검토될 수 있는 열린 질문이어야 한다. 그 질문을 ‘반백신’이라는 이름으로 봉쇄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사이언티즘의 문법이다.
주류 공중 보건계 내부에서도 균열의 조짐이 보인다. 역학자 케이틀린 제텔리나는 백신에 대한 시민들의 의구심을 교정의 대상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동료 전문가들에게 촉구했다. 이는 의심하는 시민을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기존 접근법이 이미 한계에 부딪혔다는 내부 고백이기도 하다. 문제는 처음부터 시민들의 의구심이 아니라, 그 의구심을 반과학으로 분류해 온 주류 언론과 의료 시스템의 태도였던 셈이다.
More Americans doubt vaccine safety than trust it, POLITICO Poll finds 👀
“…a plurality of Americans question the safety of vaccines, support reducing the number administered and believe that people’s right to decide what they put in their bodies…” https://t.co/xQgu0aPTN3
— The Dr. Margaret Show (@DrMargaretShow) April 17, 2026
Is trust in vaccines shifting in America?
A recent poll shows many Americans are questioning vaccine safety, with nearly half saying the science still feels up for debate. There’s also growing support for reducing the number of vaccines and prioritizing personal choice over… pic.twitter.com/Ms2HjwXLn5
— The Wellness Company (@twc_health) April 23,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