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임 주사제 데포프로베라(Depo-Provera)를 수년간 투여받다 뇌수막종 진단을 받은 여성들이 미국과 스코틀랜드에서 제조사 화이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있다. 이들은 화이자가 뇌종양 위험을 인지하고도 수십 년간 경고를 숨겼다고 주장한다. 유럽연합(EU)과 캐나다가 2022년에 이미 경고를 의무화했음에도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3년 이상 이를 거부하다 2025년 12월에야 경고 문구 추가를 승인했다. 화이자가 이 거부 결정을 소송 방어 논리로 즉각 활용하면서, 이번 사태는 수십 년째 반복되어온 규제 당국과 제약사 사이의 유착 관계를 다시 한번 노출하고 있다.
2024년 영국의학저널(BMJ)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데포프로베라를 1년 이상 사용한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에 비해 뇌수막종 진단을 받을 확률이 최대 5.5배 높았다. 뇌수막종은 뇌와 척수를 둘러싸는 막에서 자라는 종양으로, 대부분 양성으로 분류되지만 위치와 크기에 따라 시력 상실, 안면 마비, 뇌전증 등 심각한 신경학적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 이 연구는 이미 10년 전부터 프로게스틴 계열 호르몬제와 뇌수막종의 관계를 탐구한 여러 선행 연구들의 연장선에 있으며,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초기 문헌들도 호르몬의 종양 성장 촉진 가능성을 지적한 바 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구체적인 피해 사례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던디 출신의 커스티 무어(37세)는 16세부터 21년간 데포프로베라를 맞다가 2021년 뇌수막종 진단을 받았다. 시신경에 종양이 자리 잡으면서 오른쪽 눈이 돌출됐고, 네 차례의 수술에도 종양이 재성장해 현재 6주간의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다. 파이프주 쿠파 출신의 태미 크로스턴(47세)은 시신경 수술 중 합병증으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으며, 애버딘의 트리시 손더스(45세)는 뇌종양 제거 수술 후 안면 절반의 감각을 잃었다. 그녀는 과다 월경 치료를 위해 17년간 이 약을 처방받았다.
논란의 핵심에는 규제 당국의 대응 시점 차이가 있다. EU와 캐나다는 2022년에 이미 데포프로베라 라벨에 뇌수막종 위험 경고를 추가하도록 요구했다. 반면 미국에서 FDA는 2024년 초 화이자가 제출한 경고 문구 추가 신청을 거부했다. 당시 FDA는 “기존 관찰 연구만으로는 메드록시프로게스테론아세테이트(MPA) 함유 제품 전반에 경고를 추가할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밝혔다. 영국도 2022년부터 2024년 사이에 유사한 경고를 라벨에 반영했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은 2025년 초 같은 조치를 취했다. 미국은 주요 의약품 규제국 가운데 가장 늦게 경고를 도입한 셈이다.
피해자 측 변호인들이 주목하는 것은 화이자의 신청 자체가 지닌 이례적인 성격이다. EU와 캐나다가 경고를 의무화한 지 2년이 지나도록 침묵하던 화이자가 돌연 FDA에 경고 추가를 자청하고 나선 것은 통상적인 제약사의 행동 방식과 거리가 있다. 변호인들은 화이자가 주사제보다 용량이 훨씬 낮은 경구약을 신청 범위에 의도적으로 묶어 거부를 유도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제약사는 ‘변경 사전 효력 발생(CBE)’이라는 별도 규정을 통해 FDA 승인 없이도 독자적으로 경고를 추가할 수 있었지만, 화이자는 이 경로를 선택하지 않았다. FDA가 예상대로 신청을 거부하자 화이자는 곧바로 이를 근거로 소송 기각을 신청했다. 연방법이 주 단위의 경고 의무 주장을 차단한다는 이른바 ‘연방 선점(federal preemption)’ 논리였다.
소송 규모는 가파르게 불어나고 있다. 2025년 2월 미국 연방 법원이 플로리다 북부 지방법원에 집단 소송을 통합하기로 결정한 이후, 소송 참여자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2025년 3월 78건에 불과했던 연방 소송은 2026년 3월 기준 3,790건으로 늘어났으며, 이는 불과 1년 사이 약 3,873퍼센트가 증가한 수치다. 2026년 2월에서 3월 사이 한 달 동안에만 1,001건이 추가됐다. 캘리포니아, 뉴욕, 델라웨어 등 주 법원에 제기된 소송까지 합산하면 피해 청구인 수는 더욱 많다. 소송 관련 정보 전문 매체들에 따르면, 예상 합의 금액은 사안에 따라 10만 달러(약 1억 4,000만 원)에서 500만 달러(약 7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법률 회사 톰슨스 스코틀랜드가 피해 여성들을 모아 화이자를 상대로 한 집단 소송을 준비 중이다. 이 회사의 수석 파트너 패트릭 맥과이어는 피해 규모가 상당히 클 것이며, 화이자가 부담해야 할 보상금도 그에 상응하는 수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커스티 무어를 비롯한 여러 피해자들은 수십 년간 이 주사를 맞으면서 뇌종양 위험에 대해 단 한 차례도 경고를 받지 못했다고 입을 모은다.
이 논란에서 간과하기 어려운 것은 사용자 분포의 불평등 문제다. 미국에서 흑인 여성은 데포프로베라를 전체 평균의 약 두 배에 달하는 비율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고됐다. 이는 경고 문구가 늦게 추가될수록 그 피해가 사회적 취약 계층에 불균형적으로 집중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피해자 측 변호인단은 화이자가 미국 환자와 의료진에게 부작용 정보를 제때 전달하지 않으면서 해외에서는 더 강력한 경고를 표기했다고 주장한다.
데포프로베라 사태는 FDA의 보다 오래된 구조적 문제 위에 놓여 있다. FDA 전체 예산의 약 절반, 의약품 부문만 따지면 3분의 2가 제약회사들이 납부하는 ‘사용자 수수료’로 충당된다. 이 계약은 5년마다 갱신되기 때문에 협상이 결렬될 경우 FDA가 재정 위기에 처하는 구조다. 1980년대 이후 FDA 국장을 지낸 인물 중 단 한 명을 제외한 전원이 퇴임 후 제약업계로 자리를 옮겼으며, 2006년 미국 의학한림원 보고서는 이 기관의 의약품 안전 관리 시스템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고 공식 지적한다.
화이자가 이러한 구조를 적극 활용해온 정황은 수치로 드러난다. 1999년부터 2018년 사이 화이자는 로비에 2억 1,900만 달러(약 3,100억 원), 정치 후원금으로 2,300만 달러(약 320억 원)를 쏟아부었다. 2025년에도 연방 로비에만 1,266만 달러(약 177억 원)를 지출했으며, 로비스트 명단에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백악관 입법 담당 보좌관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백악관 입법 부국장,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실 출신 인사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2009년 법무부로부터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형사 벌금을 부과받았을 당시 연방 검사들은 화이자를 공식적으로 ‘상습 위반자’로 지목했고, 이 합의가 10년 사이 네 번째임을 명시했다. ABC 뉴스 의료 담당 기자 라다 치탈레는 당시 “이익이 벌금보다 크기 때문에 제약사들이 마케팅 방식을 바꿀 가능성이 낮다”고 논평했다.
코로나19 백신 사태에서도 같은 구도가 반복됐다. 2021년 공중보건 연구자 단체가 화이자 백신 임상 관련 45만여 쪽의 문서를 공개하라는 정보공개 청구를 제기하자, FDA는 월 500쪽씩 공개하겠다고 법원에 요청했다. 이 속도대로라면 전체 공개에 75년이 걸린다. 텍사스 연방 판사는 이를 기각하고 월 5만 5천 쪽의 공개를 명령했다. 화이자와 FDA가 데포프로베라 경고 신청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보여준 행보는 이 패턴과 다르지 않다. 피해자 측 변호인들은 화이자와 FDA가 사실상 공모하여 경고를 지연시키고 그 지연을 법적 방패로 전환했다고 주장한다.
FDA는 결국 2025년 12월, 화이자가 같은 해 6월 수정 제출한 신청을 승인하면서 데포프로베라 두 제형의 라벨에 뇌수막종 위험 경고를 추가하도록 했다. 화이자 측은 라벨 변경이 FDA의 결정에 따른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약물의 안전성과 효능에 대한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EU와 캐나다가 경고를 의무화한 지 3년이 지나서야 나온 조치였다. 데포프로베라는 경고 문구가 추가된 지금도 60개국 이상에서 계속 판매되고 있고 시신경을 잃고, 안면이 마비되고, 뇌전증을 안고 살아가는 여성들의 소송은 이제 시작되었다.
Thousands of Women are Suing Pfizer over their Popular Birth Control Shot, Depo-Provera, linked to brain tumors.
– EU added a warning in 2024.
– Canada has warned since 2006.
– The US has no such warning. pic.twitter.com/FrDLaHrx23— healthbot (@thehealthb0t) May 28, 2026
Scots lawyers fight for women disfigured by contraceptive jab as 40 come forwardhttps://t.co/33ZkE2dipt
— Glasgow Live (@Glasgow_Live) May 22,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