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리에 건설되는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와의 전쟁을 선포한 에린 브로코비치

비밀리에 건설되는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와의 전쟁을 선포한 에린 브로코비치

미국 전역에서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건설을 둘러싼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초당적 흐름으로 확산되고 있다. 전력 요금 인상과 수자원 고갈, 소음, 절차의 불투명성에 대한 불만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가운데, 환경운동가 에린 브로코비치가 이 흐름의 한복판에 섰다. 그녀는 지난 4월 미국 전역의 AI 데이터센터 현황과 주민 제보를 한데 모은 지도 웹사이트 ‘브로코비치 AI 데이터센터 리포팅’을 개설했고, 두 달여 만에 수천 건의 신고가 쏟아지면서 이 운동은 정당과 지역을 가리지 않는 전국적 저항으로 번지고 있다.

 

브로코비치가 미국 사회에서 입지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한 것은 30여 년 전 캘리포니아주 힌클리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다. 법률 사무 경험이 전무한 무명의 법률 보조원이었던 그녀는 1990년대 초 우연히 접한 진료 기록 더미에서 이상한 패턴을 발견했고, 이를 파고든 끝에 태평양가스전기(PG&E)가 힌클리 지역의 지하수를 6가 크롬으로 오염시키고도 이 사실을 은폐한 사실을 밝혀냈다. 그녀는 변호사 에드 매스리와 함께 주민 수백 명을 대리해 소송을 이끌었고, 결국 1996년 PG&E로부터 3억 3,300만달러(약 4,600억원) 규모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는 당시 미국에서 직접 소송을 통한 합의금으로 최대 규모였다.

 

이 실화는 2000년 줄리아 로버츠가 브로코비치 역을 맡은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로 제작됐고, 로버츠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법조계 밖 인물이 거대 기업의 은폐를 홀로 파헤쳤다는 서사는 그녀를 소비자 권익과 환경 정의를 상징하는 대중적 인물로 만들었고, 이후로도 그녀는 각지의 수질 오염과 산업재해 사건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왔다.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AI 데이터센터로 관심을 돌린 배경에 대해, 한 지역사회에서 30건의 개별 이메일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특정 사안을 두고 이 정도 규모의 제보가 몰리는 것은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신호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지도 제작 작업은 사흘 만에 47개에서 48개 주에서 제보가 접수될 정도로 반응이 빨랐다. 브로코비치는 이 과정에서 확인한 공통된 패턴을 언급했다. 주민들은 데이터센터 건설 계획이 이미 인허가를 마친 뒤에야 알려졌고, 야간에 은밀히 처리된 것 같았으며, 지방 공무원들이 비밀유지계약(NDA)에 서명한 사실조차 이웃 주민에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녀가 개설한 웹사이트에는 두 달여 만에 8천 건이 넘는 개별 제보가 접수됐고, 그 가운데 4,700건 이상이 지도에 표시됐다. 텍사스주 설퍼스프링스에서만 297건이 접수됐는데, 이 지역에서는 MSB글로벌이 30개 건물, 약 647만 평 부지에 3기가 와트 규모의 데이터센터 단지를 건설 중이다. 주민들이 제기하는 불만은 다양하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절차의 불투명성이지만, 이미 가동에 들어간 시설 인근에서는 전기 요금이 두 배에서 세 배까지 뛰었다는 신고가 이어지고 있다.

 

냉각 장치와 발전기에서 나오는 소음이 24시간 끊이지 않아 ‘미칠 것 같다’는 반응도 나온다. 이미 부담이 큰 전력망과 상수도 기반 시설에 새로운 압박이 가해지는 데다, 부지 인근 야생동물에 미치는 영향과 장기적인 건강 영향에 대한 우려도 함께 제기된다.

 

다만 브로코비치는 데이터센터 자체를 전면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이번 사안이 AI 기술 자체에 대한 논쟁이라기보다 데이터센터가 어디에 어떻게 배치되는지, 학교와 주택가, 병원 인근에 세워지는 방식이 문제라고 말했다. 실제로 주민들과의 진솔한 소통과 정직한 영향 공개, 지역사회 혜택에 대한 실질적 협상을 거쳐 시설을 받아들인 지역들도 있다며, 그런 경우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그녀가 문제 삼는 것은 인허가를 이미 확보한 뒤에야 사업이 공개되고, 개발업체가 연락을 회피하며, 지방 공무원이 주민 모르게 NDA에 서명하는 패턴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반발은 지방정부 차원의 실질적인 조치로 이어지고 있다. 브로코비치는 인터뷰 시점 기준으로 79곳 이상의 지자체가 데이터센터 건설을 금지하거나 일시 중단하는 모라토리엄을 시행했다고 밝혔으며, 이후 6월 말까지 유사한 조치를 취한 지자체는 116곳으로 늘었다. 시애틀 시의회는 9 대 0 만장일치로 1년간의 건설 중단을 의결했고, 뉴욕주 의회도 6월 1년 유예 법안을 통과시켰다. 메인주에서는 건설 중단 법안이 주 의회를 통과했으나 주지사가 거부권을 행사해 무산됐다.

 

연방 차원에서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이 각각 발의한 AI 데이터센터 모라토리엄 법안이 계류 중이지만, 토지 이용과 전력 소매 규제 권한이 대부분 주와 지방정부에 있어 연방 차원의 일괄 금지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론조사 결과도 이런 흐름을 뒷받침한다. 지난 3월 갤럽이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71%가 자신이 사는 지역 인근에 데이터센터가 들어서는 것에 반대한다고 답했으며, 이 가운데 48%는 강하게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는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대한 반대 여론보다도 높은 수치다. 반면 데이터센터 확대에 우호적인 쪽에서는 관련 산업이 건설과 숙련 기술직을 합쳐 최대 47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연구를 근거로 내세우며, 모라토리엄이 시장의 자율적인 공급 확대를 가로막고 양자 컴퓨팅 등 차세대 기술 발전까지 지연시킬 수 있다고 반박한다.

 

브로코비치는 이번 사안이 자신의 경력에서 본 적 없는 규모의 초당적 움직임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녀는 주민들이 스스로 학습하고 서로 연결되며 지방정부 청문회에 직접 나와 목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조직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환경영향평가나 정보 공개 없이 사업이 계속 추진된다면, 5년에서 10년 뒤에야 이것이 큰 실수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패턴이 되풀이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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