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리건주 산악지대의 한 바위 그늘 유적에서 나온 발굴 결과가 북미 최초 인류의 도래 시점을 둘러싼 기존 학설을 뒤흔들고 있다. 림록 드로(Rimrock Draw)로 불리는 이 유적에서 인류가 약 1만 8,250년 전부터 거주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아시아에서 건너온 인류가 약 1만 3천 년 전 얼음 없는 통로를 통해 북미에 도달했다는 기존 통설이 흔들리고 있다. 이 연대가 사실로 확인된다면 림록 드로는 북미에서 인류가 거주한 가장 오래된 장소 가운데 하나가 되며, 그 시기는 인류 최초의 거석 신전으로 알려진 튀르키예의 괴베클리 테페보다도 6,000~7,000년가량 앞선다
이번 발굴을 이끈 오리건대학교(University of Oregon) 연구진은 세인트헬렌스 화산이 1만 5천 년 전보다 더 이전에 분출하며 쌓인 화산재층 아래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주황색 마노(agate) 석기 두 점을 찾아냈다. 도구가 화산재층보다 아래에서 발견된 사실은 도구의 제작 시기가 화산 분출 시점보다 앞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인류가 이미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 지역에 있었다는 추정으로 이어진다.
석기 주변에서는 멸종한 낙타와 들소의 치아 화석도 함께 발견됐다. 이 치아 에나멜을 방사성탄소로 연대측정한 결과 약 1만 8,250년 전이라는 수치가 나왔으며, 도구가 이 화석층보다 더 아래에 묻혀 있었던 만큼 실제 제작 시기는 이보다 더 오래됐을 것으로 연구진은 판단했다. 발견된 마노 스크레이퍼 한 점에서는 들소의 혈흔 흔적도 함께 확인되어, 동물을 도살하거나 손질하는 데 사용된 뒤 버려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연구팀에 참여한 오리건대학교(Oregon State University) 인류학 교수 데이비드 루이스는 성명을 통해 “이 이른 연대는 이 지역 부족들의 구전 역사와 잘 맞아떨어진다. 많은 부족이 1만 8천 년에서 1만 5천 년 전 사이 모든 것을 바꿔놓은 사건인 미줄라 홍수 같은 지질학적 사건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왔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부족들에게는 거대한 동물과 땅 위의 괴물을 마주쳤다는 구전도 있는데, 림록 드로 유적의 증거는 우리가 실제로 대형 동물군과 상호작용했음을 보여주며 이들이 기억 이전 시대를 다루는 우리 역사 속 등장인물이 되었을 수 있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발굴 현장에서 고고학 야외 학교를 운영해 온 오리건대학교(University of Oregon) 고고학자 패트릭 오그레이디는 “1만 5천 년 전 화산재라는 판정 결과 자체가 충격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스태퍼드 리서치의 톰 스태퍼드가 내놓은 치아 에나멜 연대측정 결과 1만 8천 년이라는 수치가 나왔고, 그 아래에서 석기와 박편이 함께 나온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대측정 결과는 2023년에 처음 발표됐으나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세계 초기 인류의 기원을 다루는 유튜브 채널 블러드 메모리(Blood Memory)가 최근 공개한 영상을 통해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 다만 이 연구 결과는 아직 동료 심사를 거치지 않은 상태이며, 이는 학계의 최종 검증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올해 초 오리건주에서는 또 다른 발견이 북미 초기 인류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네바다대학교의 리처드 로젠크랜스 연구팀은 오리건 북부 그레이트베이슨 지역의 건조한 동굴들에서 마지막 빙하기 말기, 약 1만 2천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 가죽 봉제품을 비롯한 유물들을 발굴했다. 동물 가죽이나 식물성 재료처럼 시간이 지나면 대개 부패해 사라지는 물질들이 이 건조한 동굴 환경 덕분에 온전히 보존된 것이다.
연구팀은 15가지 서로 다른 동식물 재료로 만든 55점의 유물을 수습했으며, 이 가운데 일부는 의복이나 신발류로 추정된다. 그동안 학계는 당시 북미 초기 인류를 단순한 수렵채집인으로 여겨왔지만, 이번에 나온 봉제 의류와 꼬아 만든 바구니, 나무로 만든 사냥 덫 등은 그보다 훨씬 정교한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가장 잘 보존된 물적 증거로 평가된다. 로젠크랜스는 초기 문명이 싹트기 전인 충적세 이전 빙하기에도 북미 인류가 일상적인 재료를 영리하게 활용하며 혁신하고 적응해 나갔다는 사실을 이번 발견이 입증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로써 그동안 비어 있던 역사의 한 페이지가 채워졌다고 덧붙였다.
오랫동안 고고학계는 인류가 처음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인 시점을 약 1만 3천 년 전으로 못 박아 왔다. 당시 만들어진 정교한 돌창촉인 클로비스(Clovis) 유물을 근거로 이 시기를 인류 최초 정착의 기준점으로 삼았다. 이 통설에서 인류는 아시아에서 베링 육교를 건너 알래스카에 도달한 뒤, 캐나다 내륙을 뒤덮고 있던 두 거대한 빙하 사이에 좁은 통로가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그 길을 따라 남쪽으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의 유적들이 잇따라 보고되면서, 인류가 그 내륙 통로가 열리기 전에 이미 대륙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는 정황이 누적되고 있다. 림록 드로 유적은 바로 이 논쟁의 대표적인 최신 사례로, 통로가 열리기 전이라면 남은 경로는 사실상 태평양 해안선을 따라 걷거나 배로 이동하는 길뿐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