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파운드를 무너뜨린 남자가 미국 달러를 지키는 자리에 앉아 있다

영국 파운드를 무너뜨린 남자가 미국 달러를 지키는 자리에 앉아 있다

1992년, 영국 파운드화가 하루아침에 폭락한 사건이 있었다. 조지 소로스라는 투자자가 영국 정부의 환율 방어 능력을 믿지 않고 파운드화에 대규모 베팅을 걸었고, 결국 영국 중앙은행이 손을 들었다. 소로스는 이 한 번의 거래로 억만장자 반열에 올랐고, “영란은행을 무너뜨린 남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소로스 밑에서 런던 사무소를 운영하며 이 거래에 함께했던 인물이 스콧 베센트다. 그는 이후에도 일본 엔화 약세에 베팅해 큰 수익을 낸 것으로 알려진, 통화 약세를 읽어내는 데 능한 투자자였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미국 재무장관이다. 남의 나라 통화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돈을 벌던 사람이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통화인 달러를 지키는 자리에 앉았다.

 

지난 8월, 베센트의 재무부는 미국 국채를 대규모로 다시 사들이는 정책을 발표했다. 정부가 자기 나라 국채를 사들이면 금리는 내려간다. 이 방식은 과거 일본 정부가 자국 통화 약세를 감수하면서까지 금리를 억눌렀던 방법과 동일하다. 공교롭게도, 이 일본의 약점을 정확히 읽어내 큰돈을 번 사람이 다름 아닌 베센트 자신이었다.

 

더 눈에 띄는 대목은 따로 있다. 베센트는 재무부의 여윳돈을 모아두는 계좌인 재무부 일반계정(TGA) 잔고를 9,500억 달러까지 불려놓았다. 바이든 행정부 때 유지하던 수준의 거의 두 배다. 미국 방송 CNBC는 그가 이 자금을 추가 국채 매입에 쓸 수 있다고 보도했다.

 

시장은 이 발표에 곧바로 반응했다. 국채 금리는 잠시 내려갔지만 하루 만에 반등했다. 대신 달러 가치는 3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반대로 금값과 비트코인 가격은 크게 뛰었다. 통화가 불안할 때 사람들이 몰리는 자산들이 일제히 움직인 것이다.

 

브루킹스연구소 이코노미스트인 로빈 브룩스는 이 정책을 두고 “불장난을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일본이 보여줬듯이, 한번 통화 가치 하락의 소용돌이에 들어가면 되돌리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더해 미국은 이미 감당하기 버거운 수준의 빚을 지고 있다. 정부가 걷는 세금 중 상당 부분이 이자를 갚는 데만 쓰이고, 외국 정부들은 예전만큼 미국 국채를 사들이지 않고 있다. 달러가 전 세계 외환보유고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줄어드는 중이다.

 

역사적으로 기축통화 지위 상실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영국 파운드화도 마찬가지였다. 파운드가 세계 기축통화 자리를 완전히 내주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지만, 그 지위를 잃어가는 동안 영국의 생활수준은 한 세대에 걸쳐 하락했다. 2001년 아르헨티나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페소화가 붕괴했을 때 현금을 페소로 들고 있던 사람들은 자산 가치가 순식간에 증발했지만, 토지나 부동산 같은 실물 자산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타격을 덜 받았다.

 

달러 가치 하락은 저축의 실질 가치를 갉아먹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국 통화에 대한 신뢰를 잃기 시작하면 그 돈을 대체할 무언가를 찾게 되고, 바로 그 지점에 스테이블코인이 놓여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에 가치가 고정된 디지털 화폐로, 은행 계좌 없이도 스마트폰 하나로 거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최근 몇 년 새 빠르게 확산됐다.

 

문제는 이 스테이블코인들이 무엇으로 뒷받침되는가이다. 올해 시행된 GENIUS법은 미국에서 발행되는 모든 스테이블코인이 준비금을 반드시 미국 단기국채로 보유하도록 의무화했다. 달러가 흔들려서 사람들이 스테이블코인으로 몰릴수록, 그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은 더 많은 미국 국채를 사들여야 하는 구조다. 정작 가치를 잃어가는 자산이 그 대체재를 떠받치는 담보로 쓰이는 셈이다.

 

이 구조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는 스테이블코인은 트럼프 대통령 가족 소유의 월드리버티파이낸셜이 발행하는 USD1이다. 이 회사는 지난달 연방 은행 인가를 받아 직접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게 됐다. 달러의 신뢰가 흔들릴수록 사람들이 찾게 될 대체 수단 중 하나를, 대통령의 가족이 이미 은행 인가까지 받은 채로 준비해 놓은 것이다.

 

베센트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은 그의 옛 상사가 이미 예견했던 길이기도 하다. 2009년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에서 직접 소집한 비공개회의가 끝난 뒤, 조지 소로스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큰 질문은 미국 달러가 기축통화로 남아야 하는가인데, 사실 이미 아니다”라고 말했다. 같은 해 그는 IMF의 특별인출권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며, 신흥국들이 새로운 체제의 설계 단계부터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17년 뒤, 런던에서 그의 통화 트레이드를 함께 설계했던 인물이 미국의 곳간과 통화 정책을 손에 쥔 채 정확히 같은 방향으로 달러를 밀어내는 정책을 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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