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리셋인가? 우리의 미래를 위한 싸움 – 테크노크라시 대 공화국

누구를 위한 리셋인가? 우리의 미래를 위한 싸움 – 테크노크라시 대 공화국

 

누구를 위한 리셋인가? 우리의 미래를 위한 싸움테크노크라시 공화국

 

호아킨 플로레스

 

 

서방은 75년 전 파시즘의 흥망 이래로 다원주의와 공화주의 형태의 정부를 놓고 가장 큰 싸움을 벌이고 있다. 당시 사회는 전쟁으로부터 세워졌지만 오늘의 전쟁은 공화국에 대한 과두제 집권층의 경제 전쟁이고, 코로나바이러스 유행병이 다원주의 사회에 대한 대규모 쿠테타라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점차 이용되고 있어 보인다. 우리는 전쟁 뒤의 건설을 의미하는 이 커다란 리셋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미 한 세대 동안 점진적으로 엄격한 체제 하에서 살아왔다. 이 체제는 반사회적인 과두제 집권층의 전체 모습으로 정의할 수 있는 계획적 구식화, 영원히 끝나지 않는 탐욕, 권력욕을 기반으로 한 소비 중심 사회의 제도적 필연성들의 해로운 조합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최근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이 ‘더 나은 재건’이라고 쓴 간판 앞에 서 있는 걸 보았다. ‘더 나은 재건’은 조 바이든 캠페인의 슬로건이기도 하기에 많은 질문이 떠오른다. 조 바이든과 보리스 존슨은 어느 정도까지 같은 세력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가?

 

이보다 더 적절한 질문은 이렇다. 대규모 리셋은 누구를 위한 리셋인가? 대규모 리셋은 분명히 궁핍하게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대규모 리셋은 도덕적으로 부패한 집권층의 꼭두각시로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불과 몇 달 전 이 구절이 주류 언론 밖에서 사용되자 범대서양주의 기업 언론은 음모론이라고 질책했는데, 어떻게 오늘 보리스 존슨은 대놓고 ‘대규모 리셋’을 말하는가? 닐 클락이 이 훌륭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경제적 삶이 절대 이전과 같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주류 언론의 수많은 기사를 읽었다. 범대서양주의에 반대하는 언론은 심지어 이 때문에 세계화가 중단될지 모른다는 의견의 글들을 싣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화 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세계화가 되지 않는다면 세상의 여러 지역의 경제가 어떻게 될지에 관한 실질적인 토론을 그들은 회피했다. 우리는 서방에서 수십 년 동안 자주 사용된 용어인 ‘다극화’를 지정학과 국제 관계 영역에서 줄곧 이야기했다. 이제 그 용어는 이상하게도 금지되었다. 우리는 이제 포스트 세계화 패러다임에 관한 정직한 토론에서 필요한 언어를 빼앗겼다.

 

 

테크노크라시 또는 다원주의? 신언어에 저항하는 싸움

 

지금까지 우리는 지속적인 사회적 거리두기, 락다운, 격리, 위치 추적을 일방적으로 요구받았으며, 이 모든 것이 본래 확진자 증가세를 낮추기 위한 2, 3주 길이 시행이었다는 걸 우리는 완전히 잊고 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제안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 사전 계획된 제안은 ‘대규모 리셋’이란 이름으로 위장되어 있다.

 

대규모 리셋을 논의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대규모 리셋에 존재하는 거짓 이분법이다. 리셋은 현재 상태에 변화를 주지 않고 모든 걸 이전의 방식으로 돌려놓는 리셋과 그들이 홍보하는 이 ‘위대한 리셋’이 있다. 클락의 기고문에는 이 거짓 이분법에 빠지고 있고, 그는 편리하게도 다른 요점을 설명하면서 ‘일들이 이전엔 어땠었는지’에 있어 내재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다. 사실, 클락이 우리의 제안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제안하는 바는 코로나 사태 전까지 정상으로 여겼던 일들의 내재적인 문제들을 이해하면서 뉴노멀과 대규모 리셋을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 전에도 큰 문제들이 있었다. 이제 이 유행병이라는 유령이 정치화되면서 우리가 만나게 된 경찰국가적 규정들과 비교했을 때 나아보이는 것뿐이다.

 

기이하게도 이 정치화는 표면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와 연결된 확진자 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바로 이 기관들이 정치적으로 임명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계의 합의된 의견을 받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과학에서 중요한 건 의견 일치가 아니라 추정, 재현 가능성에 대한 도전이고, 상대적으로 동등한 자격요건을 지니고 있으면서 의견이 다른 과학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활기찬 논쟁이다. 저서 ‘과학적 혁명의 구조’에서 쿤이 설명하듯이 과학은 항상 진화하고 있고, 당연한 듯 의견이 일치되었던 패러다임도 잠재적으로 뒤집힌다. 그러나 우리는 이 논쟁을 보지 못했다. 이 사실은 반자유주의적인 암이 이미 결함이 있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자라고 있다는 걸 나타낸다. 이 일이 자유주의라는 플래카드 하에 벌어지고 있다는 게 역설적이다.

 

사회가 내리는 결정은 이성, 신중, 정의를 따라야 한다. 무엇이 과학적인지, 과학적이지 않은지는 나름의 역할이 있겠지만 그 자체가 결정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과학이 도로 횡단이나 운전을 금지하면 횡단보도 사고를 없앨 수 있겠지만, 정책 입안자들은 그런 사고를 줄이거나 없애는 방법을 결정하는 데 있어 자동차도, 그리고 사람도 거리를 건너야 한다는 필요성을 처리해야만 한다. 과학은 이 등식의 한 부분일 뿐이다.

 

하지만 경제 또한 과학이 아니던가? 사회학 또한 과학이 아니던가? 자살과 같은 사회적 격리의 영향을 잘 알고 있는 심리학과 정신의학은 어떠한가? 주택과 도시 계획은? 위대한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켐은 이것들이 어떻게 과학의 영역인지를  설명한다. 이 학문들은 모두 연구에서 과학적인 방식을 채택하고 적용한다. 대학들은 이들 분야에서 한 세기 넘게 박사학위를 수여해왔는데, 왜 공공 재난을 관리할 때 이 방면 전문가들의 의견이 고려되지 않는가? 일부 과학자의 말을 듣고 다른 일부 과학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항상 정치적이고 정치화된 자세이다.

 

그렇다면 용어 ‘리셋’은 무엇인가? 이 용어 자체가 오해를 일으키는 경향이 있는데, 의도적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는 테크노크라시 과두제 집권층의 신조어 사용을 비판한 조지 오웰을 알고 있다.

 

리셋의 문자적 의미는 과정에서 발생한 결함이나 문제를 지우면서, 우리가 과거에 모두 동의하고 익숙한 과거의 한 시점으로 돌아가는 걸 가리킨다. 리셋의 정의는 최근이 아닌 훨씬 이전의 과거 방식으로 일들을 되돌리는 것이다. 이는 보리스 존슨이 10월 초에 밝힌 충격적인 공개 성명의 의미와 정반대이다.

 

그러므로 용어 ‘리셋’은 대중을 설득 또는 조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특별한 기획과 고민 속에 탄생했다. 용어 ‘리셋’은 두 개의 독특한 개념을 아우르는 동시에, 뉘앙스와 복잡성을 줄이고, 생각마저 줄이는 방식으로 두 개념을 단번에 하나의 용어로 묶는다. 그렇게 과거에 동의된 합의와 관련되어 있다는 이 용어의 내포된 개념을 이용해 호소한다.

 

우리가 용어 ‘리셋’을 들은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두 개의 상호적으로 모순되는 개념을 동시에 갖게 된다. 우리는 이 리셋이 효과적으로 과거 한 시점의 방식으로 사회를 회복해야만 한다는 모순되는 말을 듣고 있다. 대중은 이 사악한 신언어 패러다임 내에서 원문의 작은 의미만을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선택권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리셋인가?

 

이 리셋은 리셋이 아니라 전체 사회 조직에 관한 새로운 제안이고, 과두제 집권층의 방식이며, 사람이 아니라 법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에서 요구되는 권한 이 그들에게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외치는 커다란 변화가 정말 필요하다고 인정하길 주저한다.

 

이 커다란 변화를 강요하는 근원적인 경제 시스템이 코로나바이러스와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걸 이해해야만 한다. 과두제 집권층이 보고 싶어하는 그들의 이 특정한 변화 방식은 코로나바이러스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아시다시피 집권층과 사람들은 하나의 시스템에 함께 묶여 있다. 장기적으로 집권층은 변화의 해결책을 찾고 있어 보이고, 그들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대중과 완전히 분리된 문명이다. 지금의 시스템은 과거처럼 지속될 수 없고, 새 제안을 압박하기에 코로나바이러스는 시기적으로 신비하면서 의미적으로 심오하다.

 

우리는 다수의 인간이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시점에 기술이 빠르게 도달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테크노크라시가 성벽으로 둘러싼 문명을 만들고 나머지 인류가 농업과 중세의 생산 방식대로 자신의 삶을 살도록 둔다면, 농업을 선택해 사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이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사이코패스와 지배층의 성향을 볼 때, 그런 우호적인 해결책일 가망은 아마도 없다.

 

그래서 락다운 반대 시위 지지가 매우 중요하다. 공공 정책을 대중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압박하는 데 핵심인 대규모 대중 시위를 금지하기 위해 락다운 조치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진보는 타협됐고, 그들은 1968년 5월 이전 모두의 사회적 시각이었던 상상의 파시스트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재벌들이 지배층이 통제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내놓는 동안,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정치 과학자들, 미래학자들, 공상 과학 소설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 시스템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진보가 종종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전 세계 공급망과 계획된 노후화에 모두 기반을 두는 소비지상주의적 경제 시스템은 더는 실현 가능하지 않다. 사실 자본주의는 원자재와 값싼 노동력을 원천으로 하는 제3세계에 의존한다. 그런데 이 개발도상국들이 이제 대부분 발전하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 국가들이 자신을 위한 원자재를 필요로 할 거라는 점이다. 세계화는 계발되기 이전의 국가들을 기반으로 했고, 실제 동력은 단어 ‘제국주의’로 가장 잘 설명된다. 그러므로 이 시스템이 과거의 유물이고 그래야 한다는 건 말이 된다.

 

이제 코로나바이러스 유행병이 동반한다고 알려진 경제 위기가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중요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코로나바이러스는 경제 위기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다른 방식의 세상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시민들이 싸워서 얻는 것이다. 미국,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독일에는 이미 대규모 락다운 반대 시위가 있었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이 시위들은 단순한 락다운 반대가 아니라 공개적이고 정치적인 연대에 대한 권리, 그리고 공개적이고 정치적인 표현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긍정적인 압력 행사이다. 이것은 집권층에 대한 견제가 조금이라도 존재하는 어느 공화국에서나 시민들이 갖는 기본권이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세상이 가능할지에 관해 2020년 4월에 ‘코로나바이러스 셧다운: 세계의 끝과 계획된 노후화 – 다극화 진입’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이 글은 무엇이 가능한지, 코로나 이전 시스템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정치보다는 경제적 용어로 설명했다. 우리는 여기서 다극화 세상에서 세계화 기반의 공급망 안전 문제와 계획된 노후화라는 더 큰 문제를 특히 3D 프린팅, 자동화, 인터넷 등의 관점에서 다뤘다.

 

우리는 같은 종류의 상품 생산 시스템이 계획된 노후화와 이에 동반되는 근로 보장 때문에 같은 종류의 상품 재판매를 보장하는 시스템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여부를 묻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졌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일하기 위해 사는가 아니면 살기 위해 일하는가? 4차 산업혁명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함에 따라, 우리는 인간 노동자가 더는 필요하지 않는 시기 이후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다원주의 사회는 집권층과 나머지 여러 다른 계층들이 계급 전쟁을 중단하기 위한 타협의 결과이다. 집권층이 그 다원주의 합의에 얼마나 헌신적인지 설명할 때는 대게 자유민주적 이데올로기의 기반을 형성하는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아이디어가 동원되며, 집권층의 다원주의 합의가 자선의 결과라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다원주의 사회는 대중이 더 공정한 미래를 위해 벌인 싸움이었다. 파시즘이라는 급진적인 결과를 내놓은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진심으로 믿는 자비로운 집권층이 존재했을 거라 의심하지 않지만 계급 갈등이 동화될 수 있거나 법으로 없앨 수 있다는 견해는 중력의 법칙이 법원에서 불법으로 판결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다.

 

우리는 아마도 이것을 잊었거나, 아직 상황이 충분히 나빠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대중은 남성 호르몬 감소로 인해 부당함에 대한 격렬한 저항 가능성이 훨씬 더 낮은 위험한 순간으로 빠지게 될지 모른다. 현재는 상황이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는 망상에 빠지게 하는 항우울제나 다른 자기 치료제이든 어떤 인공적인 수단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실제 상황을 명확히 평가해야만 필요한 전략을 세울 수 있다.

 

헌법적 권리와 다원화 사회의 종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현재의 유행병이 사용되는 정치적 위기에 우리는 처해있다. 그리고 우리 방식의 리셋을 위해 사용할 도구인 시스템이 사라지기 직전에 있다. 많은 면에서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걸 의미한다. 우리는 묻는다. 누구를 위한 대규모 리셋인가? 우리를 위한 리셋인가, 그들을 위한 리셋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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