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출신 미국 유학생, ‘북한도 이 정도로 미치지 않았다’

탈북자 출신 미국 유학생, ‘북한도 이 정도로 미치지 않았다’

컨스피러시 뉴스입니다.

 

현재의 미국은 누군가의 발언이나 행동으로 인해 기분이 나쁘거나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온라인에서 또는 심지어 사회적으로까지 매장하는 ‘캔슬 컬쳐(Cancel Culture)’와 거대 자본가들의 재단을 통해 운영되는 ‘팩트체크’ 매체가 현대인들의 소통에서 매우 중요한 수단인 소셜미디어를 장악해 대중의 입을 막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여론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데 활용되고 있습니다.

 

캔슬 컬처와 팩트체크의 배후에 있는 그들은 ‘흑인들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와 소위 ‘백인우월주의’도 이용하여 미국의 정신적, 역사적 뿌리인 건국의 아버지들의 건국 (또는 헌법) 이념까지 흔들고 있죠. 물론, 미국은 2차세계대전 이후 절대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면서 해외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컨스피러시 뉴스는 미국의 정권 교체 작전과 끊임없는 해외 전쟁의 가장 큰 비판자 중 하나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미국의 식민주의적 역사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국가 정체성을 약화하고 중요한 시기에 여론을 분열하여 대중의 저항을 무력화하려는 글로벌리스트들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입니다. 종종 이런 종류의 프로파간다는 한국의 주류 언론을 통해 비판이나 여과 없이 우리에게 전달되어 동시대의 전 세계적 주요 어젠다를 이해하기 어렵게 하고, 프로파간다의 이면을 보지 못한 정치인들은 이를 시대적 흐름으로 인식하고 국내 정책에 반영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미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탈북자 박연미 씨의 폭스 뉴스 인터뷰 기사를 소개합니다.

 


 

탈북자는 아이비리그 대학을 다닌 뒤 북한도 이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미국의 교육기관들이 계속해서 문제시되고 있는 가운데, 한 탈북자는 미국의 최고 명문 대학을 다닌 후 미국의 미래가 “북한처럼 암담하다”라고 두려워하고 있다.

 

박연미는 그동안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지만 스스로 피해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미국에 정착한 수백 명의 탈북자 중 한 명인 박 씨(27세)는 2016년 한국 대학에서 컬럼비아대로 전학을 왔다가 발견한 사실에 크게 동요했다.

 

“저는 사고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지금까지의 큰돈과 이 모든 시간, 에너지를 쏟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도록 강요되고 있습니다”라고 박 씨는 폭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우와, 이건 미친 짓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미국은 다른 줄 알았는데 북한에서 본 것과 너무 비슷한 점이 많아 걱정하기 시작했죠.”

 

이러한 유사점에는 반서방 정서, 집단적 죄책감, 숨막히는 정치적 정당성(political correctness) 등이 포함된다.

 

연미는 대학에 도착하자마자 위험 신호를 보았다.

 

오리엔테이션 도중, 그녀는 제인 오스틴과 같은 고전 문학을 즐겼다는 걸 인정하는 바람에 대학 스태프로부터 꾸중을 들었다.

 

“저는 ‘그 책들을 사랑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좋은 건 줄 알았죠”라고 박 씨는 회상했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 작가들이 식민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들은 인종차별주의자이고 편협한 사람들이었으며 무의식적으로 널 세뇌하고 있어.'”

 

아이비리그 대학에서의 모든 수업이 자신이 자라면서 본 종류의 것을 연상케 하는 반미 선전에 감염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미국놈’은 박 씨가 자라면서 배운 북한인들이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였다.

 

“수학 문제에서 ‘미국놈이 네 명 있는데, 그 중 두 명을 죽이면 미국놈이 몇 명 남습니까?’라고 말해요.”

 

그녀는 또한 성별과 언어를 둘러싼 이슈에 충격을 받고 혼란스러웠으며, 모든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선호하는 대명사를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영어는 저에게 제3외국어예요. 어른이 되어서 배웠죠. 저는 가끔 실수로 아직도 ‘그’와 ‘그녀’를 틀리게 말하는데, 이제 그들은 저에게 ‘그들(they)’로 부르라고 요청하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걸 내 문장에 포함할 수 있죠?”

 

“혼란스러웠습니다.’ 연미는 말했다. “문명의 퇴보처럼 느껴졌죠.”

 

“북한조차도 이렇게 미치진 않았습니다”라고 그녀는 인정했다. “북한은 꽤 미쳤지만, 이렇게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교수와 학생들과 여러 차례 말다툼을 벌인 끝에 연미는 좋은 평점을 유지하고 졸업하기 위해 결국 ‘입을 다물고 있는 법’을 배웠다.

 

북한에서 박연미는 사랑이나 자유와 같은 개념을 알지 못했다.

 

“억압을 봤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지 알고 있죠”라고 13살 때 바로 눈앞에서 사람들이 굶어죽는 것을 목격했던 연미는 말했다.

 

“이 아이들은 그들이 어떻게 억압을 당했는지, 얼마나 많은 부당함을 경험했는지 계속 말하고 있어요. 그들은 자유를 얻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라고 충고했다.

 

“저는 말 그대로 고비 사막 한가운데를 자유를 얻기 위해 건넜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저보다 더 열심히 싸웠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박 씨와 어머니는 연미가 13살이던 2007년에 억압적인 북한 정권을 처음 탈출했다.

 

그들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간 후, 그들을 노예로 팔아넘긴 인신매매범들의 손에 넘어갔다. 연미는 300불이 되지 않았고, 어머니는 100불 정도였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이 두 사람은 마침내 한국에 피난처를 찾기 위해 고비 사막을 걸어 몽골로 도망갈 수 있었다.

 

2015년에 회고록 ‘살기 위해(In Order to Live)’를 출간했는데, 여기서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잔혹한 독재 정권 중 하나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 필요했는지와 자유를 향한 비참한 여정을 설명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권력을 정부에 주고 싶어 죽을 지경이에요. 그것이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입니다”라고 인권운동가인 그녀가 말했다.

 

박 씨는 미국의 고등교육기관들이 비판적인 사고력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북한에서 저는 문자 그대로 나의 친애하는 지도자(김정은)가 굶주리고 있다고 믿었었죠”라고 그녀는 회상했다. “그는 가장 뚱뚱한 남자예요. 어떻게 그런 말을 믿을 수 있죠? 그러고 나서 누군가는 저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저 사람 좀 봐. 정말 뚱뚱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말랐는데.’ 나는 ‘세상에, 왜 나는 그(김정은)가 뚱뚱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라고 그녀가 이어 말했다. “사람들은 사물을 보지만 비판적인 사고 능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미국인의 무지의 깊이를 가까이서 목격하면서 연미는 인간성에 대한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었다.

 

“북한 주민들은 인터넷이 없어요. 우리는 이 위대한 사상가들과 접촉할 수 없죠. 우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세뇌당하기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세뇌당하고 있다는 걸 부인합니다.”

 

큰 희망과 기대를 안고 미국에 온 연미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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