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는 기득권에 대한 분노를 잊었다

좌파는 기득권에 대한 분노를 잊었다
좌파는 기득권에 대한 분노를 잊었다

 

데이비드 벨 박사

 

 

최근 코로나로 큰 수익을 올린 기업 및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로부터 ‘극우’라는 비난을 받는 건 피곤한 일이다. 특히 그런 사람들이 저소득층과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조롱하면서 자신들이 어떻게든 고결한 존재라고 확신하는 건 매우 짜증 나는 일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좌파’라고 부르고 나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시대적인 별명을 다시 생각하거나 버리거나, 우리의 입장에 대해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설명을 위해 내가 항상 지지해온 실제 ‘좌파’ 정책에 대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 정책들은 시대와 관련이 있는 공중보건 문제에 치우쳐져 있다. 여기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인권, 신체적 자율성, 이동의 자유를 강조.

부의 분배에서 불평등을 제한하려는 노력.

탈식민지화, 즉 극도로 부유한 국가와 그 국가에 속한 기업들(또는 그 국가들을 운영하는 기업들)이 작고 가난한 국가들에 지시하거나 그들의 부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지역 정책과 자원, 특히 의료 서비스에 대한 지역사회 기반의 영향력 또는 통제.

양질의 기본 의료 서비스를 합리적으로 평등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공적 자금이 지원되는 의료 시스템.

빈곤을 줄이고 성 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자유롭고 평등한 교육 기회.

국민의 뜻에 따라 정부가 존재하고 불가침의 규칙이 소수자를 보호하는 입헌 민주주의

(독재자의 독주를 막고 발전을 보장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인) 표현의 자유.

개인적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위의 원칙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입장을 고수할 의지.

 

목록을 늘릴 수 있지만 대체로 이것이 내가 생각했던 것이고 지금도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의식적이든 아니든 항상 그 방향으로 투표했다. 나는 글로벌 보건 분야에서 일하면서 대부분의 동료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생각을 가진 동료들과도 잘 지냈다. 그러나 눈에 띄는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난 몇 년 동안 다음과 같은 정반대의 정책 목록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마스크 명령과 접종 그리고 이를 거부하는 개인과 소수자에 대한 비방과 차별.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부의 집중의 수혜자들을 찬양하고 그들이 후원을 받는 ‘좌파’ 미디어와 함께 이를 옹호하기 위한 절박함.

저소득 국가에 실제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보건 문제의 악화를 감수하면서 서구의 문제(예: ‘모두가 안전할 때까지 아무도 안전하지 않다’)를 해결하기 위해 저소득 국가의 서구 보건 제품에 대한 광범위한 사용을 보장하기 위한 글로벌 정책의 강요.

세계보건기구, ‘자선사업가’, 후원사가 있는 앵무새 같은 미디어가 시애틀의 노인요양시설에 강요하는 것과 동일한 정책을 나이지리아 마을의 젊은 엄마들에게 강요하는 등 국제 공중보건 정책의 심화하는 중앙집권화.

영국의 NHS 암 환자를 위한 화학 요법부터 케냐의 젊은 산모에 대한 기본적인 출산 지원까지 전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의료 서비스의 접근 제한.

다음 세대의 빈곤을 증가시키고, 성 불평등을 확대하며, 아동 결혼과 아동 노동을 조장하는 학교 폐쇄의 옹호.

국민이 정부와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하게 하는 긴급 명령에 의한 통치, 그러고 나서 스위스 도시에 있는 세계보건기구 관계자가 ‘비상사태’라고 간주하는 모든 보건 사건 또는 위협에 대해 세계보건기구에 권한을 이양하려는 계획.

‘인포데믹’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개발. 여기에는 얼굴을 드러낼 권리, 일할 권리, 가족을 만날 권리를 잃은 사람들이 이러한 권리를 박탈하는 정권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는 감금을 통해 이득을 취하고 있는 동일한 정권이다. ‘인포데믹’에서는 문제가 정권이 아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기득권에 저항하던 때를 기억하는가?).

 

이러한 행동을 지지하려면 우리(‘좌파’)가 한때 믿었던 원칙을 옹호하려는 어떤 성향도 포기해야 한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약점을 감추기 위해 인권 옹호자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안티’ 또는 ‘무엇이든 부정하는 사람’으로 분류한다

 

미디어와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조지 오웰식 이중 언어를 통한 다수의 희생으로 소수를 이롭게 하는 일을 보지 못한다면 행동 심리가 의도한 대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현실을 벗어나기 전에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위의 첫 번째 목록에 동의하지만 여전히 논쟁과 욕설을 끝내려고 고집하는 사람들이라면 자기 성찰을 통해 힘을 되찾을 수 있다.

 

사람들은 마음을 바꿀 수 있다. 지적인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생각할 시간을 가지면서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명백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캔슬 (컬처), 비방, 따돌림, 학대 운동은 좌파나 우파의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로운 생각과 자유로운 교류를 가치 있게 여긴다는 이유로 타인들을  ‘파시스트’라고 부르면서 누구보다도 파시즘에 가까운 전체주의의 형태를 촉진한다. 파시즘은 자유의 동의어가 아니다. 파시즘은 이와 다른 불쾌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분열된 사회에 살고 있다. 분열은 정치적이다. 민주주의, 평등,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 이를 조롱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의 분열이다. 민주주의를 여전히 인정하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부르기를 멈추고 질문을 던지고 갖는 걸 허용해야 한다. 포용성은 교리가 아니다. 포용성은 근본적으로 그 정반대이다. 힘은 다양성에 있지 다른 사람의 획일성에 대한 복종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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